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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얼 “지미” 카터 주니어(, 1924년 10월 1일~2024년 12월 29일)는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1977-81)을 지낸 미국의 정치인이다. 민주당 소속으로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조지아주 상원 의원,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주의 76대 주지사을 지냈다. 카터는 100세까지 산 최초의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대통령이다. |
카터는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4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해군 잠수함에 승선했다. 카터는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의 땅콩 재배 사업을 되살렸다. 카터는 인종 분리 정책에 반대하며 성장하던 민권 운동을 지지했고, 민주당 내에서 활동가가 되었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조지아주 상원 의원으로 재직하였고,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조지아 주지사로 재직했다. 조지아 주 밖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크호스 후보였던 카터는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어 1976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현직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를 상대로 신승했다. |
카터는 취임 둘째 날 베트남 전쟁에서 병역을 기피한 모든 사람들을 사면했다. 에너지부와 교육부를 설립했으며, 에너지 절약, 가격 통제, 신기술을 포함한 국가 에너지 정책을 만들었다. 스태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동시에 카터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 파나마 운하 조약,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임기 말에는 이란 인질 사태, 에너지 위기, 스리마일 섬 사고, 니카라과 혁명,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위기가 이어졌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하여 카터는 데탕트 정책을 종식시키고 카터 독트린을 선포했으며, 소련에 곡물 금수조치를 부과하... |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인권 증진을 위해 카터 센터를 설립하고 비영리 주택 기구인 해비타트 운동의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2002년에 관련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평화 협상을 중재하고, 선거를 감시하고, 전염병을 근절하기 위해 여러 국가들을 여행했다. 정치적 회고록에서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썼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 관한 두 권의 책을 포함하여 세계 문제에 대한 논평도 계속했다.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의 여론 조사에서는 대체로 카터 대통령을 평균 이하의 대통령으로 평가하지만, 학자와 대중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대통... |
유년 생활. |
1924년 10월 1일 어머니가 간호사로 일하던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와이즈 요양소에서 태어났다. 이로써 카터는 병원에서 태어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조지아에서는 카터 가문은 여러 세대 동안 면화 농부로 일했다. 카터가 태어났을 당시 플레인스는 인구 600명이 사는 신도시였다. 아버지는 만물상을 운영하고 농장에 투자한 성공적인 지역 사업가로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 육군 병참단에서 예비군 소위로 복무했다. |
카터의 유아 시절에 그의 가족은 여러 번 이사를 하여 근처 아처리의 비포장 도로에 정착했는데, 그곳은 거의 대부분이 빈곤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글로리아, 루스, 빌리 세 자녀를 더 낳았다. 카터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긴 시간 일했기 때문에 종종 집을 비웠지만 부모님과 잘 지냈고, 아버지는 확고한 인종 분리 지지자 였지만 지미가 흑인 농장 노동자의 아이들과 친구가 되도록 허용했다. 아버지로 부터 1에이커를 받아 그곳에서 땅콩을 재배하고 포장하고 판매하는 등 10대에 기업가의 면모를 보였다. |
교육. |
카터는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플레인스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당시 학교에 12학년이 없었기 때문에 11학년에 졸업했다. 그 당시 아처리와 플레인스 지역은 대공황으로 인해 빈곤에 빠져 있었지만 가족은 뉴딜 농업 보조금으로 혜택을 받았고 카터의 아버지는 지역 지도자로 자리를 잡았다. 카터 자신은 독서를 좋아하는 근면한 학생이었다. |
카터는 오랫동안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꿈꿔왔다. 1941년에 그는 조지아주 아메리쿠스 근처에 있는 조지아 사우스웨스턴 주립대학에서 공학 학부 과정을 시작했다. 다음해에 카터는 시민권 운동의 상징인 블레이크 반 리어가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애틀랜타의 조지아 공과대학으로 편입했다. 조지아 공대에 재학하는 동안 카터는 예비역 장교 훈련단에 참여했다. 1943년에 그는 미국 대표 스티븐 페이스 로부터 해군사관학교에 임명되었고, 카터는 1946년에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좋은 학생이었지만 신입생에 공격적이전 사관학교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학... |
해군 경력. |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카터 부부는 대서양 과 태평양 함대에 배치되어 버지니아, 하와이, 코네티컷, 뉴욕, 캘리포니아에 거주했다. 1948년 잠수함 임무를 위한 장교 훈련을 시작하며 에서 복무했다. 1949년에 중위로 진급했고 그해 1월부터 3월까지 서부 태평양과 중국 연안에 대한 순찰에 동승했다. 1951년 카터는 디젤/전기 잠수함인 에 배치되어 행정 책임자를 포함한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
1952년 12월 12일, 캐나다 원자력공사의 초크리버 연구소에 있는 실험용 NRX 원자로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원자로가 부분적으로 녹아내렸고, 수백만 리터의 방사성 물이 원자로 건물 지하에 범람해 원자로의 핵심이 파괴되었다. 카터는 다른 미국 및 캐나다 군인들과 합류하여 원자로 정지를 돕기 위해 미국 유지 보수팀을 이끌기 위해 초크리버로 파견되었다. 고장난 원자로를 분해하는 동안 방사능에 노출되는 것을 최소하기 위해 각 팀원이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한 번에 90초씩 개별적으로 원자로 안으로 내려가야 했다. 카터는 나사 하나를 돌리는 일을 맡았다. 카터는 초크 리버에서... |
1953년 3월, 카터는 미국의 두 번째 핵잠수함으로 계획되었던 에 탑승하기 위해 스케넥터디에 있는 유니언 칼리지 에서 원자력 발전소 운영에 관한 6개월 과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울프의 건조가 시작되기 두 달 전인 7월에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사망하자 가족의 땅콩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제대하게 된다. 스케넥터디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던 로잘린은 플레인스의 소도시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엄청난 퇴보"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카터는 1953년 10월 9일에 현역에서 물러났다. 1961년까지 해군 예비군에서 복무했으며 대위 계급으로 군을 떠났다. 카터는 장교로서 미국 전역 훈... |
농업. |
부채 정산과 부친의 유산이 상속인들 사이에서 분배된 후, 지미는 비교적 적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와 로잘린, 그리고 세 아들은 1년 동안 플레인스의 공공주택에서 생활했다. 카터는 과학 및 기술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던 카터는 가족의 땅콩 재배 사업을 확장하기로 결심한다. 해군에서 농업 사업가로의 전환은 쉽지 않았고, 첫해 수확은 가뭄으로 실패하면서 농장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그는 농업 수업을 들었고, 로잘린은 회계를 배워 사업 장부를 관리했다. 첫해에는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맞췄지만, 카터 부부는 사업을 성장시키며 상당한 성공... |
초기 정치 경력 (1963–1971). |
조지아 주 상원의원 (1963–1967). |
1954년 미국 대법원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 에서 인종 분리 정책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자 플레인스에서 인종적 긴장이 고조되자 카터는 인종적 관용과 통합을 지지했지만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 1961년까지 카터는 침례교회 회원이자 섬터군 학교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인종 통합에 대해 더욱 두드러지게 말하기 시작했다. 1962년 카터는 선거 15일 전에 조지아 주 상원 의원 보궐 선거 출마할 것을 발표했다. 정치와 조직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로잘린은 선거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 투표개표 결과 카터가 상대 후보인 호머 무어보다 뒤진 것으로 나타났지만... |
의원으로 취임했을 때는 민권 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카터는 처음에는 이 문제로 인해 지역이 크게 분열되는 상황에서도 분리주의 동료들을 멀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 비교적 조용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논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냈으며, 문자 해독 시험에 반대하는 연설과 종교 실천을 강요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판단한 조지아주 헌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임기 2년 차에 주 민주당 집행위원회에 진출한 카터는 주(州)당의 당규 개정에 참여했다. 이후 연방 및 주 정부 보조금이 역사 유적 복원과 같은 프로젝트에 분배되는 것을 감독하는 ... |
1964년 보 캘러웨이가 미국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자, 카터는 즉시 그에게 도전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전에 어느 2년제 대학을 주(州)에서 4년제 대학으로 확장할 것인가를 두고 충돌한 바 있었다. 카터는 공화당으로 당적을 변경한 캘러웨이를 자신이 경멸하는 정치적 요소들을 대표하는 경쟁자로 보았다. 카터는 주 상원에서 2년 임기의 2번째 임기로 재선되었으며 임기 말에 교육 위원회 의장을 맡았고 예산 위원회에 참여했다. 주 전체 교육 자금을 확대하고 조지아 사우스웨스턴 주립대학에 4년제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법안에 기여했다. 그는 지역 계획 업무를 활용해 ... |
1966년과 1970년 주지사 선거 출마. |
1966년 주지사 선거에서 카터는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자유주의 성향의 전 주지사 엘리스 아널 과 보수주의적 인종 분리주의자인 레스터 매독스와 경쟁했다. 기자 회견에서 그는 자신의 이념 성향을 "보수적, 온건적, 자유주의적, 중도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3위로 예비선거에서 진 카터는 농업 사업에 복귀하여 다음 캠페인을 신중하게 계획했다. 이 기간은 카터에게 영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는 자신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선언했고 마지막 아이인 에이미가 태어났다. |
1970년 주지사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전직 주지사 칼 샌더스가 민주당 경선에서 카터의 주요 경쟁자로 떠올랐다. 카터는 인쇄 그래픽과 통계 분석을 활용하는 등 더 현대적인 선거운동을 펼쳤다. 여론에 대응해 그는 이전보다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며 자신을 포퓰리스트 후보로 내세웠고, 샌더스의 부유함과 민주당 전국위원회와 의 연계를 비판했다. 또한 샌더스를 부패 혐의로 비난했지만, 언론이 증거를 요구하자 이를 제시하지 못했다. 1970년 주지사 선거에서 자유주의 성향의 전 주지사 칼 샌더스가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카터의 주요 상대가 되었다. 카터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앤드... |
9월 1차 투표에서 카터는 샌더스보다 49% 대 38%로 앞서 결선 투표로 이어졌다. 이후의 캠페인은 더욱 격렬했다. 카터는 초기에는 시민권을 지지했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호소력이 커졌고, 샌더스가 마틴 루터 킹 목사 지지한다고 비판했다. 카터는 60%의 득표율로 결선 투표에서 승리했고, 공화당 후보 핼 슈트를 상대로 본선에서 승리했다. 카터는 주지사에 당선된 후 입장을 바꾸어 조지아의 인종 차별 정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흑인 주 상원의원인 리로이 존슨은 카터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저는 그가 왜 그런 종류의 극우적 캠페인을 벌였는지 이해합니다. 인... |
조지아 주지사 재임 (1971–1975). |
카터는 1971년 1월 12일 조지아주의 76대 주지사로 취임했다. 취임 연설에서 그는 "인종 차별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고 군중을 충격에 빠뜨렸으며 경선 기간 동안 그를 지지했던 많은 분리주의자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카터는 동료 정치인들과 교류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의회에서 인기가 없었다. 그는 1972년 1월에 개편 계획을 제출하여 주지사의 권한을 확대했다. 처음에는 의회에서 차가운 반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은 회기 마지막 날 자정에 통과되었다. 카터는 약 300개의 주 정부 기관을 22개로 통합했지만 그로 인해 주 정부가 비용을 절감했는지 여... |
1971년 7월 13일 기자회견에서 카터는 1972 회계연도 말까지 5,700만 달러의 적자를 방지하기 위해 각 부서장에게 지출을 줄이도록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모든 주 정부 부서가 영향을 받을 것이며, 부서들이 할당된 예산을 완전히 사용할 경우 정부 수입의 5%가 손실될 것으로 추산했다. 1972년 1월 13일, 그는 주 의회에 유아 발달 프로그램과 교도소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예산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으며, 주 정부 직원 대부분에게 지급될 4,800만 달러(2023년 기준 약 3억 4,963만 달러)의 세금 지원을 제안했다. |
1972년 3월 1일, 카터는 법무부가 하원이나 상원의 재분할 계획을 거부할 경우 총회 특별회의를 소집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의회에서 여러 개혁안을 추진해, 조지아의 부유층과 빈곤층의 학교에 동등한 국가 지원금을 제공하고, 정신 장애 아동을 위한 지역 센터를 설립하고, 수감자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했다. 또한 환경 운동가의 의견을 따라 조지아주 플린트 강에 댐을 건설하는 계획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
카터는 인권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흑인 주 정부 직원 수를 늘리고 조지아 주 의사당에 저명한 흑인 지도자 세 사람,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루시 크래프트 레이니, 헨리 맥닐 터너의 초상화를 추가로 걸었다. 이로 인해 쿠 클럭스 클랜의 분노를 샀다. 그는 1973년 1월 31일 플로리다 주지사 루빈 아스큐와의 공동 TV 출연에서 학교 통합을 촉진하기 위한 버싱(busing, 학생들을 다른 학군으로 이동시키는 정책)을 금지하는 헌법 개정을 지지했으며, 1971년 전국 주지사 회의에서 조지 월리스와 함께 반(反)버싱 결의안을 공동 발의했다. 1972년 미 연방대... |
법에 따라 재선이 불가능했던 카터는 대선 출마를 고려하며 전국 정치에 개입했다. 그는 여러 남부 지역 계획 위원회에 임명되었으며, 1972년 민주당 전당대회 대의원이기도 했는데, 당시 자유주의 성향의 미국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이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컸다. 카터는 보수층과 맥거번에 반대하는 유권자들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했다. 그는 당시에는 상당히 알려지지 않았 던 터라 대선 후보가 되는 데 실패했다. 8월 3일, 카터는 민주당이 패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월리스를 만났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
카터는 선거 운동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1976년 대선 출마를 위한 준비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전국 주지사 협회 회장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데이비드 록펠러의 지지로 그는 1973년 4월 삼국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해에 그는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의회 및 주지사 선거 캠페인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 5월 카터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정치화하지 말라고 자신의 당에 경고했는데, 그는 이것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미국인들로부터의 고립과 비밀스러운 의사결정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
대통령 재임. |
1976년 미합중국 제39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도덕주의 정책을 내세워서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
카터 대통령은 에너지 개발을 촉구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
외교 정책. |
카터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조정하여 캠프 데이비드에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수상과 함께 중동 평화를 위한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공화당과 미국의 유대인 단체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1979년, 양국 간의 평화조약이 백악관에서 이루어졌다. |
소련과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SALT II)에 조인했다. |
카터는 1970년대 후반 당시 대한민국 등 인권 후진국의 국민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취임 이후 계속해서 도덕정치를 내세웠다. |
임기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건으로 인해 1980년 하계 올림픽에 반공국가들의 보이콧을 하였다. |
그는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의 인질 구출 실패로 인한 원인으로, 1980년 제40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하며 재선에 실패하였다. |
대한민국과의 관계. |
지미 카터는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대통령 중 하나다. 인권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한때 한미 관계가 불편하기도 했다. 1978년 대한민국에 대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위협에 대비해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면서, 1982년까지 3단계에 걸쳐 주한미군을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와 정보기관·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주한미군은 완전철수 대신 6,000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인권 문제 등과의 논란으로 불협화음을 냈으나, 1979년 6월 하순, 대한민국을 방문했는데 관계가 다소 회복되었다. |
1979년~1980년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변기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그는 이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고, 이는 후에 대한민국 내에서 고조되는 반미 운동의 한 원인이 됐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해 그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을 조문사절로 파견했다.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에 대해 초기에는 강하게 비난했으나, 미국 정부가 신군부를 설득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게 됐다. |
퇴임 이후. |
퇴임 이후 민간 자원을 적극 활용한 비영리 기구인 카터 재단을 설립한 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제 3세계의 선거 감시 활동 및 기니 벌레에 의한 드라쿤쿠르스 질병 방재를 위해 힘썼다. 미국의 빈곤층 지원 활동, 사랑의 집짓기 운동, 국제 분쟁 중재 등의 활동도 했다. |
카터는 카터 행정부 이후 미국이 북핵 위기, 코소보 전쟁, 이라크 전쟁과 같이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최후로 선택하는 전통적 사고를 버리고 군사적 행동을 선행하는 행위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 하며 미국의 군사적 활동에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
특히 국제 분쟁 조정을 위해 북한의 김일성, 아이티의 세드라스 장군, 팔레인스타인의 하마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정권 같이 미국 정부에 대해 협상을 거부하면서 사태의 위기를 초래한 인물 및 단체를 직접 만나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힘썼다. 이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와 갈등을 보이기도 했지만, 전직 대통령의 권한과 재야 유명 인사들의 활약으로 해결해 나갔다. |
1978년에 채결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이행이 지지부진 하자 중동 분쟁 분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3년 퇴임 후 직접 이스라엘과 팔레인스타인의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 내는 데도 성공했다. |
1993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행동이 임박했으나, 미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미국과 북 양국의 중재에 큰 기여를 해 위기를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때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을 주선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주일 후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였으므로 김일성과 김영삼 정상회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 세계의 인권문제에서도 관심이 깊어 유엔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제도를 시행하도록 노력하여 독재자들의 인권 유린에 대해 제약을 하고, 국제형사재판소를 만드는데 기여하여 독재자들 같은 인권유린범죄자를 재판소로 회부하여 국제적인 처벌을 받게 하는 등 인권 신장에 크나 큰 기여를 했다. |
2011년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북한을 3일간 방문했다. |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의 유죄판결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한국 대법원에 발송했다. |
2020년에는 28년만에 대통령 선거에서 고향 조지아 주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 기쁨을 맛봤다. |
2021년 1월 20일에 행할 예정인 조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불참을 결정했다. 불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코로나19의 유행에 따른 방역 지침을 지키기 위해서로 보인다고 발혔는데 그 대신,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
2015년 간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아서 좋은 결과가 나오긴 했으나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된 것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 한다. 암은 흑색종으로 진단되었으며 간에서 종양이 2.5cm 절제되었다. 허나 암이 뇌에 전이된 것이 발견되었고, 2015년 8월 20일(현지시간) 오후에 첫 방사능 치료를 했다. |
그런데 그가 암을 이겨낸 지 불과 2주 만에 그의 손자인 제레미 카터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수면 중 심장마비로 고통없이 사망했으며 심장병에 걸린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
2022년 10월 1일, 98번째 생일을 맞이했으며 고향인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땅콩 축제에 참가했다. |
2023년 2월 18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자택에서 호스피스 간병에 들어갔다는 지미 카터 센터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진단을 받고 그동안 자택에서 투병 중이었으며 현재는 암세포가 뇌와 간 등으로 전이되어 더 이상의 연명치료를 포기하고 남은 시간은 가족들과 함께 보낼 것이라고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보통 만성질환이나 불치병으로 투병하는 시한부 환자들이 사망하기 전에 거치는 과정이기에 이제 그의 삶도 오래 남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의 동지이자 정치적 후배인 조 바이든 역시 이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
그의 손자인 조시 카터는 8월 19일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가 '마지막 장'에 들어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터는 2015년 당시에도 뇌암이 4기까지 진행되었으나 끝내 완치했었고 8년이 지난 현재는 그보다 더 나이가 든 만큼 카터가 곧 사망할 것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
그는 2024년 10월 1일에 백세를 맞이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29일 향년 100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
외부 링크. |
수학(數學, )은 수, 양, 구조, 공간, 변화 등의 개념을 다루는 학문이다. 수학의 주요 분야로는 산술(수를 연구하는 학문), 대수학(식과 수학적 구조를 다루는 학문), 기하학(도형과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 해석학(연속적인 변화와 그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 그리고 현대 수학의 기초로 사용되는 집합론 등이 있다. |
현대 수학은 일반적으로 엄밀한 논리에 근거하여 추상적 대상을 탐구하며, 자연 과학과 수학 자체의 필요에 의해 발전한 방법, 이론, 정리를 발견하고 체계화한다. 수학은 그 발전 과정에 있어서 철학, 과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엄밀한 논리와 특유의 추상성, 보편성이 다른 학문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특히 수학은 과학의 여느 분야들과는 달리 자연계에서 관측되지 않는 개념들에 대해서까지 이론을 추상화시키는 특징을 보이는데, 수학자들은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추측을 제시하고 적절하게 선택된 정의와 공리로부터 엄밀한 연역을 거쳐 그 진위를 파악한다. |
수학은 자연과학, 공학, 의학, 금융, 컴퓨터 과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비록 수학이 여러 현상을 설명하고 모델링하는 데 널리 활용되지만, 수학의 근본적인 진리들은 어떤 실험이나 관찰과도 무관하게 존재한다. 통계학이나 게임 이론과 같은 일부 분야는 실제 응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발전하며 흔히 응용수학으로 분류된다. 반대로 특정 응용 목적 없이 연구된 분야는 순수수학이라 불리지만, 이러한 연구 성과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치 못한 실용적 활용처를 찾는 경우가 많다. |
수학적 증명과 그에 따른 엄밀성이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 수학에서 처음 체계화되었으며, 특히 유클리드의 『원론』에서 그 전형적인 형태를 볼 수 있다. 수학은 오랫동안 기하학과 산술(자연수와 분수의 계산)로 나뉘어 있었지만, 16~17세기에 들어서면서 대수학과 미적분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등장했다. 이후 수학적 발견과 과학적 발견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해 왔다. 19세기 말, 수학기초론이 확립되며 공리적 방법이 체계화되었고, 그 결과 수학의 분야와 응용 영역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현재 수학 주제 분류(Mathematics Subject Classi... |
수학을 의미하는 mathematics라는 단어는 '아는 모든 것', '배우는 모든 것'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máthēma'(μάθημα) 및 그 활용형 mathēmatikós(μαθηματικός)에서 유래되었다. |
역사. |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명에 필수적인 건축, 천문학, 정치, 상업 등에 수학적 개념들이 응용되어 왔다. 교역·분배·과세 등 인류의 사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계산에 수학이 관여해 왔고, 농경 생활에 필수적인 천문 관측과 달력의 제정, 토지의 측량 또한 수학이 직접적으로 사용된 분야이다. 고대 수학을 크게 발전시킨 문명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그리스 등이 있다. |
특히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는 처음으로 방정식에서 변수를 문자로 쓰는 등 추상화가 발전하였고 유클리드의 원론에서는 최초로 엄밀한 논증에 근거한 수학이 나타난다. 수학의 발전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16세기의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과학적 방법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수학과 자연과학에 있어서 혁명적인 연구들이 진척되었고, 이는 인류 문명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세부 분야. |
수학의 각 분야들은 상업에 필요한 계산을 하기 위해, 숫자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토지를 측량하기 위해, 그리고 천문학적 사건들을 예견하기 위해 발전되어왔다. 이 네 가지 목적은 대략적으로 수학이 다루는 대상인 양, 구조, 공간 및 변화에 대응되며, 이들을 다루는 수학의 분야를 각각 산술,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이라 한다. 또한 이 밖에도 근대 이후에 나타난 수학기초론과 이산수학 및 응용수학 등이 있다. |
산술. |
산술은 자연수와 정수 및 이에 대한 사칙연산에 대한 연구로서 시작했다. 수론은 이런 주제들을 보다 깊게 다루는 학문으로, 그 결과로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등이 유명하다. 또한 쌍둥이 소수 추측과 골드바흐 추측 등을 비롯해 오랜 세월 동안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문제들도 여럿 있다. |
수의 체계가 보다 발전하면서, 정수의 집합을 유리수의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유리수의 집합은 실수의 집합의 부분집합이며, 이는 또다시 복소수 집합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사원수와 팔원수 등의 개념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와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자연수를 무한대까지 세어나간다는 개념을 형식화하여 순서수의 개념을 얻으며, 집합의 크기 비교를 이용하여 무한대를 다루기 위한 또다른 방법으로는 기수의 개념도 있다. |
대수학. |
수 대신 문자를 써서 문제해결을 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적 법칙을 일반적이고 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포함한다. 고전대수학은 대수방정식 및 연립방정식의 해법에서 시작하여 군, 환, 체 등의 추상대수학을 거쳐 현대에 와서는 대수계의 구조를 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선형대수학으로 전개되었다. 수의 집합이나 함수와 같은 많은 수학적 대상들은 내재적인 구조를 보인다. 이러한 대상들의 구조적 특성들이 군론, 환론, 체론 그리고 그 외의 수많은 대수적 구조들을 연구하면서 다루어지며, 그것들 하나하나가 내재적 구조를 지닌 수학적 대상이다. 이 분야에서 중요한 개념은 벡터,... |
기하학. |
공간에 대한 연구는 기하학에서 시작되었고,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비롯되었다. 삼각법은 공간과 수들을 결합하였고,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포함한다. 현대에 와서 공간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개념들은 더 높은 차원의 기하학을 다루기 위해 비유클리드 기하학(상대성이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함)과 위상수학으로 일반화되었다. 수론과 공간에 대한 이해는 모두 해석 기하학, 미분기하학, 대수기하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 군도 공간과 구조, 변화를 다루는데 사용된다. 위상수학은 20세기 수학의 다양한 지류속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분야이며, 푸앵카레 추측과 인간에 의... |
해석학. |
변화에 대한 이해와 묘사는 자연과학에 있어서 일반적인 주제이며, 미적분학은 변화를 탐구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발전되었다. 함수는 변화하는 양을 묘사함에 있어서 중추적인 개념으로써 떠오르게 된다. 실수와 실변수로 구성된 함수의 엄밀한 탐구가 실해석학이라는 분야로 알려지게 되었고, 복소수에 대한 이와 같은 탐구 분야는 복소해석학이라고 한다. 함수해석학은 함수의 공간(특히 무한차원)의 탐구에 주목한다. 함수해석학의 많은 응용분야 중 하나가 양자역학이다. 많은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양과 그 양의 변화율의 관계로 귀착되고, 이러한 문제들이 미분방정식으로 다루어진다. 자연의 많은 ... |
수학기초론 관련 분야. |
수학의 기초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 수리논리학과 집합론이 발전하였고, 이와 더불어 범주론이 최근에도 발전되고 있다. “근본 위기”라는 말은 대략 1900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어난, 수학의 엄밀한 기초에 대한 탐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수학의 엄밀한 기초에 대한 몇 가지 의견 불일치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학의 기초에 대한 위기는 그 당시 수많은 논쟁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그 논쟁에는 칸토어의 집합론과 브라우어-힐베르트 논쟁이 포함되었다. |
영향. |
오늘날 수학은 자연과학, 공학뿐만 아니라, 경제학 등의 사회과학에서도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미적분학과 선형대수학은 자연과학과 공학, 경제학을 하는데에 필수적 과목으로 여겨지며, 확률론은 계량경제학에 응용된다. 통계학은 사회과학 이론에 근거를 마련하는데 필수적이다. 16세기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주장과 함께 물리학에 수학적 방법을 도입하였고, 17세기에 아이작 뉴턴이 고전 역학의 기본 물리학 법칙들을 수학적으로 기술하고 정립하여 물리학 이론에서 수학적 모델링은 필수적 요소가 ... |
또한 수학은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과도 관련이 있다. 피타고라스는 두 정수의 비율이 듣기 좋은 소리가 난다는 점을 가지고 피타고라스 음계를 만들었다. 중세시대에도 음악과 수학을 밀접하게 연관시켰으며 성 빅토르의 후고는 “음악은 조화다”라고 했고, 성 트론드의 루돌프는 “음악은 조화의 토대(ratio)다”라고 쓴 바 있다. 조화가 반드시 소리로 표현될 필요는 없고 소리의 음악은 음악의 형식 중 하나에 불과했다. 소리에 대해 다루었던 중세의 저술가들이 있는가 하면, 조화와 비례의 추상적 이론만을 다루고 소리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저술가들도 있었다. 청각적인 면과... |
수학에서 상수(常數, )란 그 값이 변하지 않는 불변량으로, 변수의 반대말이다. 물리 상수와는 달리, 수학 상수는 물리적 측정과는 상관없이 정의된다. |
수학 상수는 대개 실수체나 복소수체의 원소이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상수는 (거의 대부분 계산 가능한) 정의가능한 수이다. |
특정 수학 상수, 예를 들면 골롬-딕맨 상수, 프랑세즈-로빈슨 상수, formula_1, 레비 상수와 같은 상수는 다른 수학상수 또는 함수와 약한 상관관계 또는 강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
문학(文學, )은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인간과 사회를 진실되게 묘사하는 예술의 하위분야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언어를 통해 인간의 삶을 미적(美的)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은 원래 문예(文藝)라고 부르는 것이 옳으며, 문학을 학문의 대상으로서 탐구하는 학문의 명칭 역시 문예학이다. 문예학은 음악사학, 미술사학 등과 함께 예술학의 핵심분야로서 인문학의 하위범주에 포함된다. |
일반적으로 문학의 정의는 텍스트들의 집합이다. 각각의 국가들은 고유한 문학을 가질 수 있으며, 이는 기업이나 철학 조류,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한 국가의 문학을 묶어서 분류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어, 성서, 베오울프, 일리아드, 그리고 미국 헌법 등이 그러한 분류의 범주에 들어간다. 좀 더 일반적으로는 문학은 특정한 주제를 가진 이야기, 시, 희곡의 모음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이야기, 시, 그리고 희곡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띨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문학의 한 부분으로서 특정한 아이템을 구분 짓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 |
더 나아가 보면, "문학"과 몇몇 인기있는 기록형태의 작업들, 소위 "대중문학" 사이에는 인식가능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때 "문학적인 허구성"과 "문학적인 재능"이 종종 개별적인 작품들을 구별하는 데에 사용된다. 예를 들어, 찰스 디킨즈의 작품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제프리 아처의 작품들은 영문학이라는 일반적인 범주 아래 두기에는 다소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예를 들어 문법과 어법에 서투르거나, 이야기가 혼란스러워 신뢰성을 주지 않거나, 인물들의 성격에 일관성이 없을 경우에도 문학에서 제외될 수 있다. 로맨스, 범... |
일반적인 문학의 분류. |
문학은 분류하는 방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
이 외에도 편의에 따라 발생적으로 대별하기도 한다. |
문학은 처음은 유일한 종류, 즉 노래하고, 말하고, 춤춘다는 것이 분화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 춤추는 것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 연극(演劇)이며, 노래하는 것이 발달하여 시(詩), 말하는 것이 발달하여 산문(散文)의 이야기가 되었다. 시는 정형시·자유시·산문시로, 또한 서사시와 서정시로 나뉜다. 산문은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진 이야기, 근대 리얼리즘의 수법 이후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소설이 있다. 이야기나 소설과 같이 특별한 구상에 의하지 않고, 작자의 흥미에 의해서 씌어지는 것이 잡문(雜文) 또는 수필이며, 이것이 날짜에 따라 씌어지는 것이 일기,... |
대중문학의 분류. |
대중문학이란 상업성을 띠며 대중을 겨냥하여 그들의 통속적인 흥미와 욕구를 채워주는 문학을 말한다. 대중문학의 하위장르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
문학과 관련된 직업. |
문학을 창작하는 예술가를 작가라고 부른다. 문예학을 연구하는 사람을 문예학자라고 부른다.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을 따로 저술가라고 한다. 문예학자와 언어학자를 합쳐 어문학자로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와 언어를 사용한 예술인 문학은 차이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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